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타니 요시츠구 (문단 편집) === 야사 === 그 군략을 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시츠구에 대해 "병사 백만을 지휘시켜보고 싶다."고 칭찬했다는 야사가 있다. 다만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고쳐도 원래 히데요시가 사람을 칭찬할 때는 오버해서 하는 편이라서 딱히 신경쓸 바는 못된다. 사실 요시츠구는 게임 등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술되었듯 행정관료로써 활약했지, 군사적인 면에서 크게 활약한 적은 없다. [[유아사 고스케]]가 목을 묻으려 할 때 때마침 동군의 무사 도도 니에몬 타카노리[* [[도도 다카토라]]의 조카이다.]가 그를 발견했다. 고스케는 사정을 설명하고, 주군의 목을 묻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내놓게 된다. 후에 이에야스가 니에몬에게 요시츠구의 목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알고는 있사오나, 사나이끼리의 약속이므로 죽어도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만약 말했더라면 큰 상을 받았을 터인데도 약속을 지키려는 그에게 이에야스는 크게 감동하여 더 큰 상을 내렸다고. 다만 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시츠구하면 유명한 것이 요시츠구가 [[한센병]] 환자라는 이야기지만 사실 여기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야기자체도 [[에도시대]]나 돼서 나돌기 시작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매독]]설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때는 가마에 탄 상태에서 지휘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전투 양상은 지휘관이 직접 말을 타고 야전 지휘를 할 일은 없었기 때문에 가마를 타고 지휘를 하는 일자체가 그렇게 드물었던 것은 아니다. 고로 이것만으로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었던 상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당시 중병에 걸렸었는지 어땠는지도 불명. 그런데, 건강한 사람을 병자로 몰고 간 창작 설화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요시타니가 자신의 병세를 기록한 직필 기록이 남아 있어서, 병에 걸렸다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것이 [[매독]]에 의한 후유증인지, [[나병]]인지는 현대에 와서도 여러 설이 있을 뿐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와는 평생에 걸친 우정이 유명하다. 어릴 적부터 히데요리의 가신으로 일하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히데요시가 보너스(2천석 현재 가치로 2억엔)를 주려고 하니 그 대신 오타니 요시츠구를 추천해서 등용하게 했다는 이야기나, 오사카 성에서 열린 다회(茶會)에서 오타니가 돌린 차[* 다회에서는 한 그릇의 차를 돌려서 마신다.]를 모두가 마시는 시늉만 하고 입에 대지는 않았으나 오직 미츠나리 만이 주저 없이 차를 들이켰고[* 한센병으로 인한 고름 한 방울이 차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 오타니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친구와의 의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참전 장렬하게 싸우다 패하고 자결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의 창작이고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히데요시하고 있었던 일이라고도 한다. 다만 전기한대로 요시츠구가 한센병에 걸렸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단순한 야사에 불과하다. 할복하기 전에 배신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군사가 있는 방향을 향해, '''인면수심이로다. 삼 년 사이에 재앙을 내리리라'''(人面獣心なり。三年の間に祟りをなさん)라고 저주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이후로 흉흉한 일이 끊이지 않았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불과 2년만에 당사자인 히데아키 또한 후사 없이 사망하여 대가 끊겨버리고 말았지만 당연히 야사. 원래 가문이 딱히 큰 가문도 아니었고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은 것때문에 히데요시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역시 근거는 없다. 오히려 오타니가는 그 뿌리를 명확하게는 알 수 없더라도 정황상 몇몇 후보가 있기 때문에 출신 배경으로만 보면 요시츠구 쪽의 격이 히데요시보다 더 높았던 것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